영화 '말모이'를 보고 (2019.1.6)
말모이란 ?
사전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자,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들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의 우리말을 모았던 비밀 작전의 이름이다.
영화 <말모이> 엄유나 감독
[경향신문] 영화 <말모이>를 보면 <택시운전사>가 떠오른다. 두 영화 모두 시대의 물결에 앞장서지는 못했지만, 그 물살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보통 사람’의 이야기다. <말모이>로 첫 연출 데뷔를 하는 엄유나 감독(40)이 <택시운전사>의 각본가였다는 사실을 들으니 이해가 되면서도 궁금하다. 그는 왜 평범한 인물을 영화로 끌고 오는 걸까. 영화가 개봉하는 날(9일)을 기다리며 “막연한 두려움과 기대를 오가고 있다”는 감독을 지난달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는 일제 식민통치가 극으로 치닫던 194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다. 극장에서 해고된 김판수(유해진)는 아들의 월사금을 내기 위해 길거리에서 한 남자의 가방을 훔치려다 실패한다. 며칠 뒤, 조선어학회 사무실에 일자리를 얻은 판수가 마주친 이는 그가 훔치려다 놓친 가방의 주인 류정환(윤계상)이었다. 정환의 반대에도 사람들의 호감을 얻은 ‘까막눈’ 판수는 조선어학회에서 일을 시작한다. 판수는 평생 ‘감옥소’를 들락이며 중학생 아들 덕진(조현도)과 어린 순희(박예나)를 홀로 키웠다. “캬악 퉤!” 사무실 바닥에 침을 뱉고, 쓸데없는 농만 주고받는 줄 알았던 판수가 변한다. 일하는 틈틈이 ‘기역’, ‘니은’을 배워 단어 시험도 본다. 더듬더듬 글자를 읽게 된 어느 날 판수는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며 눈물 흘린다.
엄 감독은 “티비 다큐멘터리에서 주시경 선생님과 조선어학회가 한국어 사전을 만들려고 시도했고, 이를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사투리 단어 뜻풀이를 보내왔다는 내용을 알게 됐다”며 “학회 활동도 대단했지만, 엄혹한 상황에서도 전국에서 사전 편찬에 도움을 주려 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쏠렸다. 그들은 사전이 뭔지도 몰랐을 텐데. 이 부분을 얘기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 ‘말모이’는 국내 최초로 편찬이 시작됐던 국어사전이다. 주시경 선생 등이 작업을 시작해 조선어사전편찬회로 이어져 1942년 초고가 완성됐다. 이후 사라졌다가 해방 직후 서울역에서 발견됐다. 이를 바탕으로 1974년 <조선 말 큰 사전> 1권이 발행될 수 있었다.
영화는 인물의 매력에 기댄다. 판수는 영화의 시작과 끝이다. ‘민족’이나 ‘자유’ 같은 원대한 이상보다 입에 풀칠하고 사는 게 걱정인 아버지다. 남들 눈엔 ‘양아치’지만, 이웃엔 따뜻하고 능청스럽게 남을 챙길 줄도 안다. 못 배운 한으로 아들은 경성제일중학교에 보낸다. 그는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친일파도 아니다. 무대가 일제 강점기의 경성이든, 1980년의 광주든 달라지는 건 없다. 판수는 그저 부딪혀 온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보통 사람’이다.
엄 감독은 “사람들은 어떤 사건에서 대표라거나 앞장선 사람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진짜 영웅은 보통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모았을 때, 뭔가 만들어지고, 그게 역사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작품도 돌이켜보니 내가 평범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며 “내 아버지, 옆집 아저씨, 어렸을 때 만났던 선생님. 누구라도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진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지만, 전반적으로 코믹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영화의 맛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유해진 덕이다. 영화 속 웃음 포인트의 상당수가 유해진의 애드립이었다고 한다. 엄 감독은 “유해진은 치열한 배우지만, 이 치열함을 편안하게 전달할 줄 아는 배우”라며 “대중적이면서 친근한 느낌의 그를 처음부터 판수역으로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유해진이 덕진·순희와 보여주는 호흡도 좋다. 세 사람은 촬영 현장에서도 가족 같았다고. 엄 감독은 “유해진이 어린이날 두 아역 배우에게 선물을 챙겨줬다. 덕진 역의 현도군도 어버이날 유해진에게 편지를 쓴 것으로 안다”며 “세 사람이 있는 모습이 정말 가족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충무로에서 흔히 만나기 어려운 여성 감독이다. 과거 영화 연출부에서 일했다는 그는 “10여년 전을 생각하면 현장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택시운전사’부터 좋은 제작자를 만났고, 영화 현장에서도 여성 촬영감독님과 일할 수 있었다”며 “운이 좋은 편이라 이런 문제에 둔할 수 있지만, 모든 여성 영화감독과 신인 감독들이 다 잘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고 말했다.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 독립운동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해에 영화가 개봉했다. 엄 감독은 “올해가 이렇게 중요한 해인지는 몰랐다.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알게 됐는데 의도하고 2019년에 개봉한 것은 아니다. 역사를 생각해보면서 영화에도 관심을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