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석파랑(석파정 별당)과 세검정(2024.3.28)

홍길동이 2024. 3. 28. 21:38

석파정 별당은 1958년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이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다. 일본에 건너가 추사 김정희의「세한도를 찾아온 인물이다. 석파랑은 소전의 집념이 지어낸 건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집을 짓기 위해 30년 동안 전국 곳곳을 수소문해 목재와 기와 등을 모았다. 운현궁·선희궁·칠궁·이완용의 별장 등의 자재들이다. 덕수궁 돌담이 철거될 때는 트럭 30대 분을 옮겨왔다. 그 자취들을 모아 1963년부터 6년에 걸쳐 건축 했다.
언덕배기의 석파정 별당으로 유명하지만 입구에 있는 문서루 또한 예사 한옥이 아니다. 순정효황후 윤 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왔다.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호벽(胡壁)을 재현했고 입구에는 신라와 백제의 와당을 붙여 품위를 더했다. 덕분에 옛 한옥의 기품이 그대로 살았다. 거리와 접한 돌담을 따라서는 대나무를 심었다. 뒤쪽 주차장 쪽에서 보는 전경은 또 다르다. 누마루가 있어 한층 그윽한 운치를 안긴다. 대지의 높낮이 차가 적잖았음을 보여준다.

         만세문과 석파정 별당

만세문 만세문은 고종황제의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에 세웠던 문이다. 만세를 누리라는 의미로 무병장수와 만사형통을 기원한다. 구름 사이로 불로초를 물고 나는 암수 두 마리의 학과 박쥐 등이 그려졌다. 만세문을 지나 문서루로 향한다. 외국인들에게는 소원을 비는 하나의 통로다
석파정 별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석파정 별당(서울시 유형 문화제)
400년 되었다는 회양목 나무

1976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정자가 있는 이 지역은 한성의 북방 인후(咽喉 : 목구멍)가 되기 때문에 조선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하던 곳이다.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은 것이 바로 세검정인데, 당시 총융청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가 지은 《창암집 蒼巖集》에는, 육각정자로서 1747년(영조 23)에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이곳은 도성의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산과 백운산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며,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탕춘대(蕩春臺)라는 언덕이 있었고, 부근에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장의사(藏義寺)라는 절이 있었다.

원래의 정자는 1941년 화재로 타 버렸으나,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丁자형의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세검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궁궐지 宮闕志》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에는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 : 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림)하였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또한, 《한경지략 漢京識略》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그 밖에 세검정과 관련된 시로 정약용(丁若鏞)의 〈유세검정 遊洗劍亭〉이 있다.

           이사진은 퍼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