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산행코스는 청룡사 - 은적암 - 정상 - 석남사 - 정상 - 좌성사 - 은적암 -
청룡사로 10:00에 인천에서 출발 12:00에 안성 서운산에 있는 청룡사앞에 도착하여 곧장 산행을 시작하여 원점인 청룡사에 도착한 시간은 15:20분이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끝없이 걷는다. 석남사에서 서운산 정상으로 되돌아 오는
구간은 경사가 심하고 눈길이라 무척 힘들다. 나는 오늘 무작정 걷는 산행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고 어떤 결론에 도달 하였을까?
청룡사 사적비..절입구 도로 가운데 있어요.
청룡사(靑龍寺)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대장암으로 창건, 그 후 공민왕 13년(1394) 나옹선사가 지정연간(1341∼1367)에 이 산을지나면서 지혜의 해가 거듭 빛나고 자비의 구름이 광채를 냄에 이 곳에 신비한 징조가 있겠다고 생각하시고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과연 꽃비가 내리고 상서러운 구름이 일면서 용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이 곳에 주석을 하시면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하고, 절 이름을 청룡사라 명명하였다.
절 안에는 대웅전,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각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지어져 조선후기에 다시 지은 것으로, 조선후기의 기법과 양식을 잘 보존하여 보물 제823호로 지정되었다.
청룡사에서 유명한 것은 자연미를 살린 기둥이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채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사람이 만드는 건축물에 최대한 자연미를 살린 우리나라 건축의 한 특징을 보여 준다.
청룡사는 공양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다가 세종 19년(1437) 세종의 명에 의하여 고양으로 옮겼고, 후에는 인평대군의 초상화를 모시고 왕실의 태평을 비는 왕실의 원찰로 삼았었다.
이 곳은 조선후기에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이들은 인근 불당골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기예를 뽐내며 안성장터를 비롯해 경기, 충청도 등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하였다고 한다.
기둥으로 사용한 목재가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입니다.
이것이 무 꾸밈의 미학이 아닐런지요.
나의 손/나의 발..
감로수..
은적암..
석남사 마애여래 입상..
발가락만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문화재청에서 퍼온 사진 입니다. 비교해 보시기를 ...
석남사 금광루...
석남사 대웅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영산전 입니다.
석남사 영산전(石南寺 靈山殿)
원래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불전의 명칭인데, 이 곳은 16나한을 함께 봉안한 것이 특징이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팔작집인데 칸수에 비해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지붕가구는 오랑으로 구성하였다. 내부를 보면, 불단은 건물 뒷벽에 붙여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석가삼존불을 모셨고, 그 위에 부처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해 닫집을 매달아 장엄하게 꾸몄다. 중앙의 불단 좌우에는 'ㄱ'자형으로 불단을 구성하여 16나한상을 모셨다.
이 영산전은 1562년 처음 건립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보물 제823호로 지정되어 있다.
※ 민흘림기둥 : 기둥 뿌리가 굵고 위로 가면서 굵기가 줄어드는 기둥
※ 닫집 : 궁전 안의 옥좌 위, 또는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의 모형
영산전 내부..
계곡에는 고드럼이...
헬기장..
좌성사 산신각..폐사처럼 보존 상태가 안좋아요...
청룡사 부도군...
바우덕이는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남사당 입단 ( 당시 5세 )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 학습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당시 15세)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상 꼭두쇠로 활동 시작 (당시 꼭두쇠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 수상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안성 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됨
1870년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침→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최초의 연예인:남사당 바우덕이 폐병으로 사망(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골짜기에 묻힘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후기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자로서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던 사람이다. 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1853년 5세의 어린나이에 안성 남사당패에 맡겨져서 노래, 줄타기, 악기연주, 살판 등 갖가지 기예를 익혔다. 바우덕이는 어려서부터 줄타기, 살판, 노래, 풍물놀이 등 남사당 놀이의 모든 기예에 남다른 소질을 발휘하여 남사당패와 함께 공연을 나가면 관람객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받았다고 한다. 안성 남사당패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고 벌어들이는 수익도 늘어나는 등 남사당패 내부에서도 바우덕이의 존재 가치는 더욱 커졌다. 바우덕이가 15세가 되었을 때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던 꼭두쇠가 연로하여 새로운 꼭두쇠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어린 바우덕이가 모든 단원들의 만장일치로 꼭두쇠로 선출되었다. 당시로서는 나이가 15세밖에 안되었고 더군다나 여자의 신분으로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바우덕이의 뛰어난 예술적 소질과 공연장에서의 스타성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고종2년(1865) 흥선대원군이 안성남사당패를 불러들여 경복궁 중건 사업에 지친 노역자들을 위로하였는데 최고의 공연을 펼쳐서 노역자들을 기쁘게 해주었고 흥선대원군은 감사의 표시로 당상관 정3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수여하였다. 이때부터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 남사당패와 모든 놀이패의 최고 우두머리 단체로 활동하였으며, “바우덕이패가 왔다. 바우덕이다”와 같이 “바우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때부터 대한민국 연예가 발생한 시점으로 보고 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연예인을 그래서 “바우덕이”라고 평가한다. 바우덕이는 이후로도 전국을 다니며 남사당이라는 천한 놀이문화를 대중공연문화로 발전시켜 백성들의 억눌린 한을 풀어 내리고 위로하는 활동을 지속하다가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폐병을 얻게 되고 1870년 23세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남사당패가 바우덕이의 주검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바우덕이의 무덤이 있다.
바우덕이 상..
'산이좋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 봉천산, 하점면 석조여래입상, 하점면 5층 석탑 (20014.2.3,월) (0) | 2014.02.04 |
---|---|
겨울 설악산 대청봉 산행(2014.1.25,토) (0) | 2014.01.25 |
장봉도 섬여행(2013.11.14)...4 (0) | 2013.11.16 |
장봉도 섬여행(2013.11.14)..3 (0) | 2013.11.16 |
장봉도 섬 여행 (2013.11.14)...2 (0) | 2013.11.16 |